장기간 의료소송에도 '한풀이' 못하는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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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승소는 0.6% 불과…과실 의사 재판 끝나도 요직 (서울=연합뉴스) 한지훈 이신영 서혜림 기자 =
'총, 균, 쇠'로 잘 알려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최근 저서에서 "서구식 재판은 누가 상처를 받았느냐,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따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환자 자신이나 유족이 의사를 상대로 제기하는 의료소송은 연간 1천건을 돌파해 지난해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그러나 법원 판결은 이들의 고통을 가라앉히는 데 여전히 역부족이다. 다이아몬드의 지적처럼 의료소송에도 피해자의 아픔을 달래는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 법원 안팎에선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논의와 시도가 활발하다.
◇ 의료소송의 3가지 특징과 한계법률 전문가들이 꼽는 의료소송의 특징은 판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화해 조정이 잘 안 되며, 상소율이 높다는 것이다. 모두 사건 당사자가 소송 제기 후 '가시밭길'을 걷는 이유다. 12일 대법원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처리된 의료소송(소액사건 제외) 944건 가운데 환자 측이 완전 승소한 것은 6건(0.64%)에 불과했다. 2002년부터 12년 동안의 연평균치도 0.69%로 비슷한 수준이다.법원이 환자 측 청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인색해 보이는 것은 책임 제한(과실 상계) 때문이다. 재판부는 사고 당시 환자 측 행동이 치료 효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면 배상액을 크게 낮춘다. 의사의 과실이 분명하다고 해도 그 책임을 80% 이상 인정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고법 한 판사는 "환자의 건강 상태는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본래 위험성을 가진다"며 "의사도 일부러 의료사고를 내지 않기 때문에 배상액을 산정할 때 참작할 사유가 있다"고 말했다. 환자 측은 그나마 소액의 배상금과 위자료를 받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재판부가 감정인의 견해를 한 번 듣는 것만 3~4개월, 소송 제기부터 1심 선고까지는 평균 2년이 넘게 걸린다.더욱이 의료소송은 환자 측이 1심에서 패소하면 화해나 조정 없이 항소심과 상고심으로 쭉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체 민사 합의사건의 항소율이 30%대라면 의료소송은 두 배인 60%대를 넘나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시민연대 사무총장은 "의료소송은 소송 기간이 길고 환자가 의사의 과실을 입증하기도 매우 어렵다"며 "환자들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의료사고 과실 밝혀져도 의사는 건재 환자 측이 민·형사소송에서 이긴다고 해도 법원에서 과실이 인정된 의료진이 계속 병원에 남는 경우가 많다. 재판 이후의 실질적인 징벌을 원하는 피해자 입장에선 못마땅한 부분이다.서울중앙지법은 최근 신장수술 부위와 상관없는 동맥 혈관을 실수로 잘라 환자를 과다 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한 대학병원 비뇨기과 주임교수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해당 교수는 법원 판결 이후에도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병원 측은 민사 의료소송 결과는 징계 사유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형사재판에서 벌금형이 나와도 마찬가지다. 같은 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실수로 갈비뼈 사이 동맥과 정맥에 구멍을 내 환자를 숨지게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됐다.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이후에도 교수직을 유지했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의료사고를 낸 의사가 협회를 통해 징계를 받은 경우는 최근 기억에 없다"며 "각 병원에서 인사위원회 내규에 따라 처벌하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실제로는 의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민사 판결, 유죄를 인정한 형사 판결이 각각 병원의 자체 징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의사 명성이 곧 병원 실적이라 함부로 징계하지 못 한다"며 "유사 사고를 막기 위해 사안이 심각한 경우 의사 면허를 정지·박탈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족의 의료사고로 소송을 제기해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은 박모(30)씨는 "사고를 낸 의사가 사과 한마디 없이 요직에 남아있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 피해자 아픔 달래기 위해 논의와 시도 의료소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법조계에서는 새로운 논의와 시도를 진행 중이다. 환자 측 입증 책임의 경감, 공정하고 객관적인 감정(鑑定),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활용 등이다.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변호사는 최근 논문 '법대 아래에서 본 의료재판'에서 "의료지식의 전문성, 의료행위의 밀실성, 의료정보의 편중성 등으로 인해 환자가 승소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료사고의 인과관계는 환자 측이 입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법원은 소송의 특성상 입증 책임을 다소 완화해 손해의 공평한 부담을 꾀하고 있다고 신 변호사는 소개했다. 판사의 심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감정의 공정성·객관성에 관한 문제 제기도 많다. 본인도 의사인 감정인이 피고 측 과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만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감정인이 동업자 의식 때문에 의료과실 인정에 보수적일 수 있다"며 "판결이 감정에 많이 의존하는 만큼 재판부가 객관적인 결과를 끌어내려 노력한다"고 전했다. 이밖에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활용해 의료소송 전 단계에서 미리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가 있다. 작년 9월 발간된 '의료분쟁 조정·중재 통계연보'에 따르면 중재원은 2012년 한 해 동안 조정·중재 신청 503건을 접수, 157건의 처리를 마쳤고 이 중 129건의 조정을 성립시켰다.특히 사건당 평균 처리 기간이 두 달 남짓이어서 의료소송보다 훨씬 빨랐다. 다만 병원 측의 조정절차 거부로 인한 각하가 많았던 점은 개선해야 할 부분으로 지적됐다. 서상수 법무법인 서로 대표변호사는 "소송 비용이나 기간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피해자라면 중재원을 통해 피해의 일부라도 신속히 구제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hanjh@yna.co.kr, eshiny@yna.co.kr, hrse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