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거부권 때와는 달랐다. 대통령의 두 번째 거부권은 일을 크게 만들었다. 농민을 상대로 한 양곡관리법 때와 달리 간호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간호사들이 ‘준법투쟁’ 등 사상 초유의 단체행동에 나서면서 그간 의료계에 누적돼온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당장 불거진 것은 이른바 ‘PA 간호사’ 문제다. PA(Physical Assistant) 즉 진료보조 간호사는 공식적으로는 없는 직종이다. 초음파 및 심전도 검사, 채혈, 봉합, 대리수술, 기관 삽관 등 의료행위는 의사가 하지 않으면 불법임에도 이들 PA 간호사가 해왔다. 그동안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가 파업을 벌여도 대형병원이 잘 굴러갔던 이유는 이들 PA 간호사가 의사가 할 일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대한간호협회(간협)는 대통령 거부권 직후 불법진료신고센터를 개설하고 회원들로 하여금 병원에서 일어난 불법행위를 신고하게끔 했다. PA 간호사들의 신고가 폭주하면서 5월18일부터 운영된 이 사이트는 한때 트래픽 초과로 접속이 막히기도 했다. 5월24일 간협은 ‘준법투쟁 1차 결과’를 발표해 총 1만2189건의 불법 진료 사례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접수된 내용을 분석한 결과, 신고 대상은 종합병원이 5046건으로 가장 많았다. 불법 진료행위를 지시한 사람은 교수, 전공의, 기타(간호부 관리자나 의료기관장 등) 순으로 많았다. 구체적인 유형으로는 검사(검체 채취 등)가 6932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처방 및 기록, 튜브 관리, 치료·처치 순이었다. 특히 수술 1703건, 약물 관리(항암제 조제) 389건도 확인됐다.
간호사의 준법투쟁은 그동안 은폐돼온 병원 내 불법을 폭로한다는 취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확대하려는 간호법 제정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행위와 관련한 간호사의 임무를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라고 정의하고 있다. 보조를 넘어서는 의료행위는 간호사 단독으로 할 수 없다.
간호사의 준법투쟁은 일종의 ‘미러링’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듯 이런 불법은 수시로 일어난다. ‘진료의 보조’라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보니 만성적으로 의사 수가 부족한 병원에서는 간호사가 의사의 일부 업무를 대신하는 관행이 굳어졌다. 앞서 간협의 발표에 따르면, 간호사들이 불법임을 알면서도 의료행위를 한 이유는 '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가 2925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위력 관계(2648건), 환자를 위해서 등 기타(1919건), 고용 위협(1735건) 순이었다.
더욱이 의료행위를 하다 보면 무 자르듯 의사와 간호사의 업무를 나누기 쉽지 않다. 결국 실제 업무 구분은 법원 판례나 당국의 유권해석을 통해 이뤄진다. 이를테면 간호사가 환자의 피를 뽑을 때 동맥은 불법이지만, 정맥은 합법이다. 출혈 위험이 큰 동맥 피는 반드시 의사가 뽑아야 하고, 정맥 피는 의사의 지도하에 간호사도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7년에는 음주운전 교통사고 가해자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피를 뽑은 간호사가 의료법 위반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당시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간호사는 경찰 입회하에 의사 없이 채혈했다가 낭패를 겪었다. 이 사건은 결국 헌법재판소까지 간 끝에 ‘의사의 포괄적인 지도·감독’이 있었다고 봐야 하므로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처럼 모호한 의료법 구조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간호사가 처벌 대상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간협은 의료법이 초고령사회 돌봄 확대에도 걸림돌이라고 주장한다. 의료법 제33조는 보건소 등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이렇다 보니 병원 밖에서 의사의 지시 없이 간호사가 혈압과 혈당을 측정하는 것도 불법이다. 벽오지에 사는 이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방문간호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간호사들은 현행 의료법으로는 돌봄 시스템 구축이 어렵다며 간호법 제정을 주장했다. 간호인력의 업무 범위, 공간, 처우 개선 등을 체계적으로 규율하는 새로운 간호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반면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간호법 반대 단체와 정부는 현행 의료법 틀 안에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니까 준법투쟁을 통해 간호사들은 현행 의료법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일종의 ‘미러링’이다.
간호사의 단체행동은 준법투쟁을 넘어 ‘정치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년 총선을 겨냥해 총선기획단을 꾸리고 간호법 제정을 막은 정치세력의 낙선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1인 1정당 가입 운동도 펼치기로 했다. 낙선운동의 대상과 정당 가입 운동의 대상이 어디일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2월 민주당이 간호법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하자 의협은 낙선운동을 펼치겠다며 반발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또한 미러링이다. 이와 함께 6월 중순까지 간호사 면허증을 모아 보건복지부에 반납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려면 우선 간협이 어떤 단체인지 알아야 한다. 간협은 간호사들의 최대 이익단체다. 현직 간호사 대다수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2022년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의료기관·학교 등에서 활동하는 간호사 수는 약 39만명이다. 여기에 면허를 가진 전직 간호사와 간호대 학생까지 합치면 포괄하는 인원이 약 62만명에 달한다. 전체 인원은 간호조무사(약 72만명)가 많지만 결속력은 간호사들이 훨씬 세다.
규모에 비해 과거 별다른 존재감은 없었다. 의협처럼 의료계 현안이나 이해관계에 적극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간호사 ‘태움(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아 안팎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창립 이래 지금까지도 임원선거에서 간선제를 유지하고 있다. 간협을 잘 아는 관계자에 따르면, 집행부의 절대다수가 국민의힘 지지자일 정도로 보수적이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전날까지도 간협 집행부 일부는 정부·여당에 거부권 행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정부·여당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간협은 거부권 행사 나흘 전인 5월12일 ‘국제 간호사의 날’을 맞아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세’를 과시했다. 주최 측 추산 10만명, 경찰 추산으로 2만5000명이 참석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간협에 충격을 안겼다. 아산병원 간호사 출신인 최훈화 간협 정책전문위원은 “죽창으로 간호사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은 기분이다”라는 문자메시지를 간협 회장에게 보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대통령 거부권이 간호계에 준 상처가 컸다.
익히 알려졌듯 간호법 제정은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대선 때 약속한 사항이다. 약속 파기 논란이 불거지자 정부·여당은 말만 꺼냈을 뿐 공약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뿐 아니라 원희룡 당시 선대위 정책본부장, 국민의힘 강기윤 의원(국회 보건복지위 간사) 등이 간호법 제정 필요성을 언급한 영상을 간협이 공개하면서 간호사들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특히 원희룡 정책본부장은 지난해 1월11일 간협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 국민의힘은 누구 못지않게 앞장서서 조속히 (간호법이) 입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윤석열) 후보께서 직접 약속을 하셨다. 정책본부장으로서 공식 발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간호사 출신 국회의원 9명 있었지만
간호법 추진의 역사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간호협회는 ‘요양상의 간호와 진료의 보조’라는 문구가 전부인 의료법의 한계를 지적하며 독자적인 간호법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했다. 그러나 이후 46년째 간호법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1981년 11대 국회 이래 간호사 출신 국회의원 9명이 있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간호사 출신인 김화중 장관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음에도 간호법은 제정되지 못했다. 이번 국회에서 최연숙 국민의힘 의원이 법안을 발의하기 전까지는 과거 어떤 간호사 출신 국회의원도 간호법을 발의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 아주 오래된 금기 같은 것이었다.
간호법 제정이 급물살을 탄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다. 간호사들의 헌신이 널리 알려지면서 간호·돌봄 시스템 구축과 간호사 처우 개선에 대한 공감대가 커졌다. 2021년 여야 모두에서 간호 법안이 발의됐다.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 각각 간호사와 약사 출신인 국민의힘 최연숙·서정숙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다. 법안 세 개 중 두 개가 국민의힘에서 나왔다. 세 법안의 공통점은 간호사의 임무에서 기존 의료법에 있는 ‘진료의 보조’라는 문구를 들어냈다는 점이다. 대신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 같은 문구로 바꿨다. ‘보조’의 기준이 불명확한 데다가 의사와 간호사 사이 관계를 협력보다는 종속적으로 규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2022년 대선 때까지만 해도 간호법 제정을 공언했던 국민의힘 입장은 대선 이후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의협 등 간호법 반대 단체가 ‘진료의 보조’ 삭제에 강력 반발하면서 국민의힘도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진료의 보조가 삭제될 경우 간호사들이 의사의 지시를 떠나 독자적인 의료행위를 일삼을 것이라는 간호법 반대 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의사의 지도하에’라는 문구가 남아 있음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국회는 해당 조문을 없애거나 의료법과 동일한 문구로 변경했다. 이번에 통과된 간호법은 사실상 누더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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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들 처지에서 마지막으로 건진 것이 바로 최근 간호법 논란의 핵심 쟁점인 ‘지역사회’ 네 글자였다. 간호사의 임무를 ‘의사의 지도하에’ ‘진료의 보조’로 묶어둔 채 활동공간을 의료기관과 함께 ‘지역사회’로 넓힌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마저도 반대 측에서는 간호사들이 지역사회에서 단독으로 의원을 열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우려했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가 아닌 간호사는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은 이번 간호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법안 표결을 앞두고 국회 본희의장에서 퇴장했다.
4월27일 국회 본회의에서 당론을 거스르고 간호법에 찬성 표를 던진 국민의힘 의원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코로나19 때 대구 동산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현장을 지휘했던 최연숙 의원이다. 그는 자기 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장에서 울먹이며 찬성토론에 나섰다. “저는 38년간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간호법은 간호사 직역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법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의 간병을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한 '간병 살인' 문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코로나 때 숙련된 간호인력 부족으로 맞은 재난적 위기 상황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호법은 국가의 책무를 담고 있는 법입니다.”
또 한 명은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이다. 김 의원은 찬성투표 후 언론 인터뷰에서 “단순히 의료단체 간의 분쟁이 있다고 해서 옳은 일을 미루는 건 옳지 않다”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도 간호법 제정 필요성이 나왔다. 지난 2월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천하람 후보는 “최근 우리가 약속했던 간호법 제정이 이런저런 핑계 속에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래선 안 된다. 코로나19 터널에서 정치권은 경쟁적으로 의료인을 칭송했고, 그 과정에서 간호법 제정을 약속했다. 윤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16일 거부권 행사 당일 국무회의에서 이들 여당 정치인의 말과 상반되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번 간호법안은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간호 업무 탈의료기관화는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5월24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통해 “공약한 바 없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이후 간협이 발표한 성명에는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던 후안무치한 탐관오리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들이 말하는 탐관오리는 몇몇 정치인과 보건복지부다. 간호법 제정을 요구했던 이들이 가장 분노하는 대상은 대통령이나 의사 단체보다 보건복지부다.
보건복지부는 간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간호법안, 국회 본회의 의결 그 후’라는 카드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다(그림 참조). 이 카드뉴스는 정부의 공보물이라기엔 놀랄 만큼 편파적인 데다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우선 정부가 간호법에 우려를 표하는 이유에 대해 ‘간호사 혼자 환자를 돌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간호법 어디에도 간호사 혼자 환자를 돌볼 수 있게 하는 조항은 없다. 보건복지부는 간호조무사 등 다른 직역 단체가 반발하기 때문에 협업 체계가 깨지고, 결국 간호사 혼자 환자를 보게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가정법을 내세운다.
간호조무사 학력을 ‘고졸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는 대목은 명백히 가짜뉴스다. 간호법은 간호조무사가 되려면 특성화고 관련학과를 나오거나 간호조무사 학원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을 뿐 대졸 이상 학력자의 간호조무사 자격을 막고 있지 않다. 대졸자라도 자격증을 따려면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22년 간호조무사 시험 합격자의 41%가 대졸 이상이었다고 간협은 주장한다.
심지어 이 조항은 기존 의료법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정치권과 언론에서 이 내용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논란이 커졌음에도 보건복지부는 명쾌한 설명을 내놓고 있지 않다. 간호법 논란에 대한 해법을 내놓기는커녕 결과적으로 보건의료계를 이간질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시사IN〉과 통화에서 “‘학력 제한’이라는 문구 자체가 적확하지 않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입장을 낼 계획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랬던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간호법 거부권 행사 이튿날인 5월17일 갑자기 가칭 ‘의료요양돌봄통합지원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간호법의 대안이자, 기존 의료법을 뛰어넘는 상위법 개념이다. 이 법에 맞춰 의료법, 국민건강보험법, 노인장기요양보험법까지 개정하겠다는 방안이다. 보건복지부 담당자는 논란이 된 ‘의료기관 밖(지역사회)’ 의료행위까지 포괄하겠다고 밝혔다. 보건의료계 갈등이 곪을 대로 곪은 뒤에야 뒤늦게 ‘대수술’을 해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또 있다. 의대 정원을 확대한다는 소식이다. 2006년 이후 17년째 3058명으로 동결된 의대 정원을 300~500명 정도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의대 정원 확대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고질적인 의사 수 부족 문제를 해소하려 정원 확대를 꾀할 때마다 의사 단체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코로나19 이후인 2020년 여름에도 정부가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자 의사 단체는 파업으로 맞섰다.
이번에는 좀 다르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의료현안협의체를 열고 논의를 시작했다. 전격적인 의대 정원 확대 가능성에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일각에서는 간호법 거부권과 의대 정원 확대를 맞바꾼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국회는 5월30일 본회의에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재투표를 할 계획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후 재투표에서 다시 의결하려면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113석의 국민의힘이 반대하면 간호법 제정안은 폐기된다. 앞서 설명했듯 간협 측은 향후 방침을 중장기적 정치투쟁으로 가져간다는 계획이다.
돌봄을 기후위기 같은 의제로 끌어올려야
다시 말하지만, 이번 간호법은 차·포를 뗀 법이었다. 간호인력 전체의 처우 개선과 돌봄 시스템 구축에 턱없이 모자란 법이다. 진보 성향인 ‘행동하는 간호사회’의 경우 거부권 행사 직후 성명을 통해 윤 대통령의 ‘행정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이번 법안에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법제화 같은 실질 내용이 빠졌다고 지적했다. ‘지역사회’ 네 글자만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할 만큼 의료계에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음을 확인했다는 점이 어쩌면 이번 사태의 교훈인지도 모른다.
간호법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럼에도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깨진 밥그릇’이라도 일단 만들어놓고, 이후 개정과 시행령·시행규칙을 통해 본래 간호법의 취지를 살리면 된다는 것이다. 간호조무사, 응급구조사 등 의료체계에서 중요한 직역에 대한 개선책도 간호법 제정 이후에 오히려 속도를 낼 것이라고 본다. 장기적으로 간호사의 위상과 처우가 나아져야 간호조무사의 그것도 함께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애 말기 돌봄 문제를 다룬 〈각자도사 사회〉를 쓴 송병기씨는 의료인류학자다. 그가 보기에, 간호법 정국은 중요한 계기다.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도 이미 모두 알고 있다. 인구구조가 바뀌면서 의료시스템의 큰 틀이 치료에서 만성질환 관리로 바뀌리라는 것을. 그런 점에서 간호법 논쟁은 하나의 신호탄이자 힌트다. 돌봄을 의사와 간호사 등 몇몇 직역의 일로만 국한하는 것을 넘어 기후위기 정도의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려야 할 시간이 왔다.”
실제로 이번 간호법 정국의 키워드는 ‘돌봄’이었다. 직역마다 입장은 달랐으되 돌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부 정치세력과 대통령, 그리고 행정 당국이 이를 ‘직역 간 갈등’ 프레임으로 변질시켰지만,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서도 사회적 논의는 진전될 수밖에 없다. 2023년 한국 사회가 드디어 ‘돌봄의 미래’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