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년간의 투병 끝에 완치를 앞두고 있던 9살 종현이는 정맥으로 들어가야 할 항암제 빈크리스틴이 척수강 안으로 투여되면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은 병원과 유족 간 합의로 종결됐지만 파장은 줄어들지 않았다. ‘종현이법’이라는 ‘환자안전법’ 제정 청원운동이 작년 8월 시작돼 최근 1만 명 문자 청원이 이뤄졌다. 지난 9일에는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대규모 입법 토론회가 국회 차원에서 개최되었다. 환자안전연구회에서 2009년부터 이 법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후 4년 만의 일이다.
1999년 미국 의학원은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To err is human)’ 보고서에서 입원 환자 중 2.9∼3.7%가 위해 사건을 경험하고, 매년 적게는 4만4000명에서 많게는 9만8000명이 ‘의료 오류’로 사망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위해 사건은 약물이나 시술의 특성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과, 미리 준비하고 점검하면 예방이 가능한 ‘의료 오류’로 나뉜다. 미국 의학원이 제시한 의료 오류로 인한 사망은 유방암이나 에이즈(AIDS)로 인한 사망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캐나다, 영국, 호주, 덴마크 등에서 조사한 결과에서도 입원 환자의 위해 사건은 적게는 3.8%, 많게는 12.9% 정도로 나왔다. 국내는 현재까지 이런 연구 결과가 제시된 적은 없다. 다만 외국의 발생 빈도, 2010년 우리나라의 입원 건수, 예방 가능성을 가지고 추정했을 때 의료 오류로 인한 사망이 적게는 4800명에서 많게는 5만 명 정도다. 추정치의 평균(1만7000명)으로는 운수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고, 가장 높은 수치로는 순환기계 질병으로 인한 사망 바로 아래다.
일반인의 기대와는 달리 의료는 본질적으로 안전하지는 않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환자의 몸에 칼을 대고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항암제를 환자에게 투여한다. 양질의 의료인력과 안전한 시스템을 갖춰야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위해 사건이나 의료 오류가 발생했을 때, 어디에서 무엇이 일어났고 얼마나 일어났는지 알아야 개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의료소송, 전문가 명성, 직장 내 신뢰 등의 문제로 이런 사건들은 거의 보고되지 못한다. 실제 1995년 한 대학병원에서 수혈 부작용사건 보고서가 검찰 조사의 대상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수혈 부작용 보고서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환자안전법제도를 일찍 도입한 미국이나 덴마크 등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위해를 입은 환자는 몇 년간의 의료소송을 통해서도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하고 심신이 피폐해지고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의사들은 몇 년간의 소송 끝에 이긴다 하더라도 상처밖에 남지 않았다. 의료보상 보험 재정은 파탄지경까지 갔다. 위해 사건을 예방하고 경미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원인을 분석해 더 큰 사고를 막아야 한다. 심각한 사고가 한 번 발생하면 실제로는 29번의 경미한 사고와 300건의 사고로 이어질 뻔한 사건이 있다고 한다. 개인에 책임을 묻기보다 시스템을 개선하고, 비난보다는 오류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미한 사건들이 보고되고 전국 단위에서 자료를 모아 상세한 현황이 분석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 의학원의 보고서 이후 6년 뒤 미국에서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환자 안전과 질 향상 법’이 제정됐고 2009년부터 시행됐다.
환자 안전을 위한 제도적 개선과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2011년 환자안전법제도 개선을 위한 공청회에서 보건복지부는 “환자 안전을 위한 직접적 예산은 전무하다”고 밝혔다. 이 상황은 지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암, 뇌졸중, 심장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많은 정책과 투자가 있지만, 정작 이에 비견되는 문제에는 가시적인 정책이나 예산도 없는 상황이다. 최근 환자안전담당자가 배정돼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위안이 되는 정도다.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시도는 이것이 ‘환자 안전 문화’를 싹트게 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추진되고 있다. 이 위에 어떤 건물을 지어 올릴 것이냐는 보건의료계의 몫이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일하던 레지던트가 저지른 의료 오류의 책임을 누구에게 지울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동안 일하지 않게 하고 환자가 위해를 입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2013 여성신문의 약속 - 여성이 힘이다
이재호 / 울산의대 응급의학과 교수
1234호 [오피니언] (2013-04-17)